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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심리학

속도 중독 세상 속 정서적 탈진

by loveyourchoice 2025. 5. 26.

speed addiction
출처 : 픽사베이 / 속도 관련 이미지

인간이 멈추지 못하는 가속의 시대

일상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매 순간 끊임없이 달리고 있습니다. 빠른 결정, 짧은 메시지, 식사 중 멀티태스킹, 심지어는 산책 중에도 팟캐스트를 듣습니다. 우리는 속도를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산성이 항상 효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과도한 속도 집착은 때로 심리적 회피의 가면일 수 있습니다. 속도중독이라 불리는 이 심리적 경향은 우리의 실행 능력보다는 내면의 불안을 드러냅니다. 왜 우리는 느려질 때마다 불안을 느끼는 걸까요? 이 글에서는 속도중독의 심리학적 뿌리를 탐색하며, 그것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진짜 감정을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게 만드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속도중독은 감정 회피의 또 다른 얼굴

속도중독은 본질적으로 감정 회피의 형태입니다.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애리얼리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기쁨을 추구하기보다 불쾌함을 회피하는 데 더 강하게 동기부여된다고 합니다. 속도는 그런 불편함을 앞질러 도망가는 전략입니다. 자기성찰, 슬픔, 존재적 질문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계속해서 바쁘게 지내는 것입니다. 특히 전두엽은 방향성과 통제를 선호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활동하는 것은 일시적인 통제감을 주며 불안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임상심리학자 정은미는 “감정 통합 없이 행동만을 활성화하면 감정적 불일치와 충동 의존성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즉, 우리는 실제로는 발전이 아닌 감정 회피를 위해 움직임에 중독되는 것입니다.

정적은 왜 위협처럼 느껴지는가

속도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고요함은 휴식이 아니라 위협입니다. 속도가 멈추는 순간, 미처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기억, 후회, 억눌린 감정이 몰려옵니다. 정신분석가 하인즈 코헛은 자기심리학에서 "내면의 일관성이 부족할수록 사람들은 행동으로 과잉 보상한다"고 말합니다. 즉, 속도는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심리적 지지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존은 결국 심리적 탈진, 감정 불안정, 해리 증상 등의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적은 사회적 가치 평가와도 얽혀 있습니다. 우리는 '바쁘다'는 말로 가치를 증명받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멈춰 있는 순간조차도 ‘쓸모없음’이나 ‘게으름’으로 오인받을까 두려워합니다. 한국심리학회가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내적 긴장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정적 상황에서 자기비난적 사고가 활성화되어 불안이 증폭된다고 합니다. 결국 정적을 회피하는 것은 감정 자체보다 그 감정이 불러일으키는 자기 평가의 불안을 피하려는 시도일 수 있습니다.

속도중독은 행동화의 또 다른 양상

겉보기엔 높은 기능을 수행하는 생산적 행동 같지만, 사실 이는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방어 기제인 ‘행동화’일 수 있습니다. 무기력함을 느끼는 사람이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계속해서 확인하거나, 새로운 일정과 계획을 끝없이 수정하는 것은 불확실성의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김혜원 정신과 전문의는 이를 ‘속도화된 행동화’라 명명하며, “감정 회피가 성실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탈출 전략일 뿐”이라고 분석합니다. 이러한 속도 중심의 행동은 대인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줍니다. 늘 바쁘게 움직이기 때문에 상대방과 진심으로 교감하거나 대화에 집중지 못하게 되고, 결국 속도중독자는 점점 더 고립됩니다.

특히 이 행동화는 자기 효능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임상심리연구팀은 ‘속도 기반 행동화’를 반복하는 사람일수록 자기결정감이 낮고, 타인의 시선에 과도하게 민감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내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에 우선순위를 두는 심리 구조를 반영합니다. 결국 속도중독자는 외면적으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내면에서는 끊임없는 회피와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느림을 선택하는 것은 심리적 재연결의 길

느리게 사는 것은 단순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심리적 필수 조건입니다. 속도를 줄인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 가치, 관계성과 다시 연결되는 선택입니다. 심리치료 관점에서 자신이 속도에 중독되어 있다는 자각은 정서 조절의 첫걸음입니다. 정신분석가 낸시 맥윌리엄스는 “억압된 내용은 정적 속에서만 떠오르고 통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속도중독을 넘어서려면 생산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욕망의 동기를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느림은 실패가 아닙니다. 느림은 ‘존재함’이고, 통합이며, 치유입니다. 우리가 느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 속도에서 비로소 ‘진짜 나’와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료 출처

  • Schacter, D. L. (1999). The Seven Sins of Memory. American Psychologist.
  • 한국심리학회 (2020). “속도중독과 감정회피의 상관관계.” 한국임상심리학저널, 15(3), 211-227.
  • 서울대학교 정신과 (2021). “행동화 기제와 내면 인식의 상관성.” 정신의학 리뷰, 14(2), 95-111.
  • 프랭클, V. E. (1985).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 박지원 (2022). “현대인의 가속화된 삶과 심리적 피로.” 서울대 심리문화연구, 17(1), 183-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