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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심리학

"엄마이자 딸이자 팀장인 나" 정체성 중첩의 피로

by loveyourchoice 2025. 6. 2.

 

Identity layer
출처 : 픽사베이 / 정체성 관련 이미지

끊임없이 바뀌는 역할 속, 나는 누구인가?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한 가지 역할만 수행하며 살아가는 일이 드물다. 나 역시도 워킹맘으로서 아침에는 아침밥을 준비하는 엄마로, 낮에는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중간 관리자로, 저녁에는 아이돌봄을 도와주신 부모님의 안부를 살피는 딸로 살아간다. 이 역할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뀌며, 그때마다 우리는 각기 다른 기대와 사회적 규범에 맞춰 자신을 조정해야 한다. 겉보기엔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인지적 에너지를 요하는 과정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발생하는 심리적 부담을 "정체성 중첩 피로(Identity Layer Fatigue)"라 부른다. 평소에 괜찮다가도 부여받은 다양한 역할 속에 지쳐가는 내 자신의 심리를 알아보기 위해 이 글을 쓰면서 공부해 보고자 한다.

역할 전환이 주는 인지 과부하: 멀티태스킹보다 더 힘들다

인지심리학에 따르면, 작업 전환(task switching)은 뇌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특히 역할이 바뀔 때는 단순히 주의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말투와 태도, 감정의 높낮이까지 조절해야 하므로 더 많은 인지 자원이 소모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역할 전환 비용(role transition cost)'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팀장 역할을 수행하다가 퇴근 후 부모 역할로 전환할 때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런 전환이 반복되면 뇌는 금세 지치고, 자율신경계에도 과부하가 걸릴 수 있다.

또한 작업기억(working memory)의 지속적인 소진은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이는 자기조절(self-regulation)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지며, 연구에 따르면 작업기억이 고갈되면 감정 조절 실패와 충동적 행동이 증가해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일상 기능과 정서 건강을 약화시키는 인지적 탈진 상태다.

역할 충돌이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

문제는 단순한 피로감이 아니라, 역할 간의 내부 충돌이다. 예를 들어, 완벽한 팀장이 되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지만, 그로 인해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면 “나는 좋은 부모인가?”라는 죄책감이 따라온다. 심리학자 도널드 슈퍼(Donald Super)는 인간이 생애 전반에 걸쳐 여러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으며, 이 균형이 깨지면 '역할 긴장(role strain)'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 긴장은 자기효능감 저하와 무력감, 심하면 번아웃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역할 간의 충돌로 인해 자아개념(self-concept)이 혼란스러워질 경우, 정체성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역할 정체성 갈등(role identity conflict)'이라고 부르며, 지속적인 역할 불일치는 자아 통합의 위기를 야기한다고 본다. 예컨대, 직장에서는 인정받지만 가정에서는 정서적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서사가 붕괴되며, 이는 우울감과 불안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하나의 자아로 머무르기 어려운 이유

우리는 왜 하나의 정체성에 머물 수 없을까? 그 이유는 현대 사회의 사회문화적 환경에 있다. 우리는 여러 플랫폼과 관계망 속에서 끊임없이 '보여지는 자아'를 조율하며 살아간다. SNS에서는 감정적으로 성숙한 사람처럼, 직장에서는 유능하고 단호한 사람처럼, 가정에서는 따뜻하고 배려 깊은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은 이러한 자아의 다층적 표현을 '자기 연출(self-presentation)'이라 설명하며, 과도한 연출은 정체성 고갈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결국 우리는 수많은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가 되어가고 있다.

정체성 피로를 줄이기 위한 심리학적 실천

정체성 피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수행 중인 역할을 인식하고, 그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역할에 100점을 줄 수는 없다. 때로는 70점짜리 엄마, 80점짜리 팀장이어도 충분하다는 자기자비적 인식이 필요하다. 또한 역할 간 전환을 돕기 위한 경계 의식을 설정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집에 도착한 뒤 10분간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팀장 역할을 내려놓고 부모 역할로 전환하는 식의 습관은 인지적 전환에 유익하다. 마지막으로, 주기적으로 “내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자문함으로써 자동화된 역할 수행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식적 개입은 피로를 줄이고 자아 통합감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자료 출처

  • Goffman, E. (1959). 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
  • Super, D. E. (1990). A life-span, life-space approach to career development.
  • 김춘경 외 (2020). 『심리학의 이해』. 학지사.
  • 박영신 (2019). 『자기이해와 성장을 위한 심리학』. 학문사.